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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8.01.07 조회: 1686

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기록영화제작가

그 사람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며 거목인 백범 김구보다 꼭 열 해 늦었습니다. 그리고 서른세 살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해 조국해방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9년 1월, 김규식 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해서 한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날은 백범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이틀 전입니다. 다시 그해 11월, 일본정부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호텔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일본 조야를 발칵 뒤집고 마침내는 내각을 총사퇴시키는 계기를 만듭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본국으로 압송돼 3년 징역형을 받은 데 이어, 1942년 일본에서 귀국 도중 또 한 차례 일경에 체포돼 두 번째 투옥됩니다.

백범이 두 번 체포돼 해주감옥과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1936년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그가 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조선중앙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자신도 사장직에서 물러납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보도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두 해 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에 맞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통해 당한 아홉 번째 테러였으며, 백범이 테러로 서거하기 이태 전 일입니다. 그의 호는 몽양, 이름은 여운형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보다 스물두 해 늦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있던 해인 1919년 늦가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중국 길림성에서 다른 열두 명의 열혈동지와 함께 대일테러단체 의열단을 결성하고 그 단장이 됩니다.

백범이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기 꼭 열두 해 전의 일입니다.

그가 보낸 의열단원 김지섭은 일본왕을 제거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황궁 앞 이중교에 폭탄을 던졌다가 체포돼 옥사합니다. 한인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일본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지기 여덟 해 전의 일입니다.

의열단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 사람은 중국 국민당이 세운 황포군관학교를 수료한 뒤 서른다섯 살에 난징(南京) 교외에서 혁명간부학교를 열고 교장에 취임합니다.

백범이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 군관학교 안에다가 한인특별대를 설치하기 한 해 반 전에 말입니다. 또 이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이듬해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에 취임한 뒤 우한전투에 참가합니다.

백범이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기 두 해 전의 일입니다. 1939년에는 독립운동 관련 한인 정당들을 통합하는 데 김구와 함께 선봉에서 7당 통합회의를 이끕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망명세력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정부로 개편될 때, 그는 군무부장(1942년 12월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이미 취임)으로, 백범은 주석으로 취임해서 망명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함께 합니다.

이 무렵 그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혼례를 올릴 때 백범이 주례를 섰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백범을 존경했고, 백범 또한 그를 아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도 백범을 뒤따라서 12월 2일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그때 마흔여덟 살, 호는 약산 이름은 김원봉입니다.

약산이 고향 밀양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아가자 마을사람들은 금의환향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지방 경찰서장도 찾아와 인사를 드렸고요. 사실 이분이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사는 동안 그의 부모형제들은 고국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제로부터 받았을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과도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제 완전히 바뀐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1947년 3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주도한 24시간 총파업 때 이분은 조국의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런데 체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입니다.

노덕술이 누굽니까? 해방 전 12년 동안 평안남도 보안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경찰의 간부가 돼서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을 한 것이죠. 의열단 활동이 한창일 때 같았으면 벌써 그는 어느 의열단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노덕술은 해방 뒤엔 수도청 수사과장을 지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이내 석방됐습니다. 그리고 1955년 육군범죄수사단 대장 직을 마지막 경력으로 남긴 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의열단 단장으로 많은 공적을 쌓고 광복군 부사령과 임시정부의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약산은 해방된 조국에 들어와 그의 손으로 가장 먼저 제거했어야 했을 부왜역적 친일경찰의 손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이때의 충격과 상심으로 1948년 4월 스스로 월북했고, 그해 9월 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공산독재 정권과는 상종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결국 1958년 11월 예순한 살 나이로 숙청됐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일이 더 있습니다.

일제 때는 숨을 죽이며 살았고, 해방 뒤 잠시 동안만 세상의 부러움과 주목을 받은 약산의 부모형제는 약산의 월북과 함께 빨갱이 집안으로 지목됐고, 그들은 일제 때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몰락합니다.

625 때는 네 형제가 모두 한국경찰에 떼죽음 당했고, 노부는 굶어죽었습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몇 해 전에 추산하기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국내외 동포가 1천만 명, 독립운동자(의병, 독립군, 광복군 포함)가 6백만 명, 순국선열자가 6십만 명쯤 되는데, 그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분이 9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두 독립운동가는 현재의 서훈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자란 이유에서지요.

물론 약산의 경우는 이념이 어떻고 계기가 어찌되든 간에 자진 월북했고, 또 북한의 초기 내각에서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몽양과는 처지가 다를 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특별히 약산을 언급한 까닭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마지막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 들어와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한테 체포돼 고문까지 받았던 그 통탄할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는 월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정부는 최근,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을 '완화'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서훈을 검토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서훈이 보류됐던 113명의 좌익 계열 독립운동자 중에서 상당수 인사가 새로 서훈을 받게 될 거랍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해방 뒤 정부수립 과정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 정부는 반공 논리만을 강조해 이념적으로 너무 편협한 공적 심사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때는 좌파도 독립운동 이념 중 하나였으므로 그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어왔던 만큼, 저도 이번 기회에는 그동안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히기를 기대합니다.

천상에서 백범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그분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든 아니 하든, 그들의 겨레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 헌신, 업적은 영원히 변치도 사라지지도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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