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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의 분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8.03.06 조회: 3191

을미의병

1895년 8월 20일 일본인들에 의하여 국모인 민비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고 있던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민비 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이에 대항하여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1896년 8월 22일 서울에서는 민비 폐위를 반대하는 창의고시문이 붙었고, 제천에서는 유인석과 그의 문인 수백명이 거의소청의 방법으로 공론을 모았다.
또한 10월 11일, 충청북도 보은의 문석봉은 의병을 모아 회덕 관아를 공격하고 무장하여 의병항쟁에 돌입하였다.

초기 의병의 모습

을미사변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단발령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을미개혁이 발표되자 의병항쟁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1896년 1월 경기 지역에서는 박준영을 대장으로 하여 의병항쟁이 일어났으며, 충청 지역에서는 홍주의·김복한·이설 등과 제천의 유인석과 그의 문인 서상렬 등이,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의 이항로의 문인 이소응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이들은 합류하여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살해하고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도 살해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이루어지자 조선조정에서는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군대를 지방에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여 경상도 지역의 산청에서 발생했던 곽종석, 김천과 성주는 허위, 그리고 전라도에서의 기우만 등의 의병들을 공격하였다.
초기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었고 여기에 반일·반침략을 부르짖던 일반 농민들과 동학 농민군 세력이 참가하면서 의병항쟁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유생의병장들과 달리 일반 농민들은 반봉건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유생의병장들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친일파 전권이 무너진 뒤 단발령이 철회되고 고종이 의병해산의 명령을 내리자 스스로 부대를 해산하였다. 반면에 농민중심의 의병운동은 반침략·반봉건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국모가 섬 오랑캐의 해를 입었으니 하늘과 땅이 바뀌었고, 성상(聖上)이 단발의 욕을 받았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관동창의록』, 민용호.

상투가 있고 없음에 인간과 짐승이 구분되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으니, 머리가 만 번 갈라질지언정 상투는 한 번도 잘릴 수 없다.  - 유인석


위의 글을 당시 유생들이 일제의 만행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쓴 글로 그들의 분노와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Tip. 을미사변


1895년 민비가 ‘삼국간섭’을 기회로 일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케 하자 러시아와 즉각 결판을 낼 수 없었던 일본은 민비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은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정규군, 영사경찰 등 일본의 공권력을 구사하여 자행하였다. 이 사건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일본정부와 무관할 수가 없으나, 그들은 관련 자료를 송두리째 인멸·왜곡하고 그들 정부의 관련 사실을 시종일관 부인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범행 책임을 거꾸로 대원군과 훈련대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전에 계획을 세워 대원군과 훈련대를 범행 현장으로 끌고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시해된 명성황후(현재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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