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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발발과 을사조약의 체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8.03.06 조회: 5468

러일전쟁의 발발과 을사조약의 체결


대한제국에 불법상륙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국경을 넘어서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 분할점령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엄정 중립국임을 선포하였다.진해만에 집결한 일본 함대1904년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였다. 2월 8일 여순에서 첫 포성이 울린 뒤, 2월9일 새벽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 서울에 입성하고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엄정중립국을 선포한 조선에 일본은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되어 있으나 군사전략상의 요충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등 나머지 조항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 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으로 대한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곤스케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에 간섭하였다.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 조약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들이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었다.하지만 일본에서는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대한제국에서 보충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일본은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로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하야시 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워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를 강행하려는 을사보호조약(제 2차 한일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안은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공사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에게로 전달되었다.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군과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강요에 의해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공사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서 각각의 대신에게 가부의 결정을 요구하며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을 철폐하여 신설한 통감부로 이양하고 각지에 있던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하였다.특히 통감부에서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대한제국 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고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을사조약체결 축하기념촬영을 하는 이토히로부미와 일본 관료 그리고 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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