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史 > 독립운동이야기
3.1운동과 주 파리위원부와 공관과 한국 교민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8.03.13 조회: 2728

 

 
   
 
칼럼
 
한국의 독립, 프랑스에서도 준비 중이었다
 
[해외칼럼] 3.1운동과 주 파리위원부와 공관과 한국 교민
 
입력 :2008-03-10 10:47:00   이진명 교수
 
 
금년 2008년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난지 89년이 되는 해,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35년간의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된지 63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포된지 60년,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이를 종식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55주년이 되는 해다. 그중 특히 정부 수립 60주년에 큰 의미를 두고 다양한 행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48년 9월 9일 공포되어 역시 60주년을 맞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도 마찬가지다.

차제에 3월 1일을 맞아, 프랑스에 거주하는 교민들뿐만 아니라 파리를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기억해 두었으면 하는, 파리의 한국과 관련된 대표적이고 상징성이 기념물이 무엇일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는 아마도, 파리 9구, 생-라자르(St-Lazare) 역에서 가까운 샤토당 가(街)(rue de Châteaudun) 38번지, 1919년부터 4월부터 1920년 5월까지 1년간 주 파리 대한민국 상해 임시 정부 위원부(대표부)가 있었던 건물일 것이다. 위원부 사무실은 1920년 5월에 샤또당 가 38번지에서 멀지 않은, 생-라자르 역 동편 8구의 비엔느 가(街)(rue de Vienne) 13번지로 이전하여 1921년 7월까지 존속했다. 비엔느 가 13번지 시절에는 위원부 대표 김규식은 미국으로 떠나고 없었고, 황기환이 서기장으로 외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상징성이 크고 작음은, 우리가 그 대상물에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 있다. 자료로만 알려져 있던 그 건물에 2006년 , 파리 시, 파리 9구 구청, 건물 주인들의 협조와 동의를 받아, 주불 한국 대사관(당시 대사 주철기), 프랑스 정부 당국의 관계자들, 교민들 성원하에,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은 2006년 3월 1일 기념 현판을 부착함으로써, 공식적인 상징성이 부여되고,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건물 외에도 한국을 회상시키는 기념물들이 몇 더 있다. 이중에는 밖에 노출되어 있어 누구나 가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입장료를 내고 건물 안에 들어가거나, 열람증을 발급 받아야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한국 천주교의 모태인 뤼 뒤 박(rue du Bac) 가의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뇌이이의 열대 식물 재배원(Jardin d'Acclimatation) 내에 있는 서울 공원 (2002년 준공), 파리 14구 몽파르나스 역 뒤에 있는 서울 광장(Place de Seoul), 1977년까지 장기간 주 프랑스 한국 대사관으로 사용된 파리 17구의 빌리에 가(avenue de Villiers) 29 번지의 아담한 붉은색 3층 벽돌집, 앵발리드 군사 박물관 내에 있는 한국동란 프랑스 참전 대대 유물들, 기메 동양 박물관의 한국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국 예술품,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전적들과 고서들, 동양어 대학 소장 한국 고서들이 그것이다.

최근의 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 해설을 위한 휴대용단말기(PDA)의 '한국어 음성 가이드' 서비스를 들 수 있다. 이는 물론 루브르를 방문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어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한국어가 중국어보다 먼저, 일본어 다음으로 루블에 들어간 것은 한국인의 무형의 자랑 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맛난 한국의 미식은 TV극 ‘대장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만은 아니고, 파리의 어디서나 먹어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렁찬 3·1운동의 함성으로 대변되는 한국 민족의 저력으로부터 이어져 나오지 않았나 싶어, 어려웠던 그 당시의 선인들의 활동, 그중에서도 파리에서의 활동을 뒤돌아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임시정부 주 파리 위원부가 파리에서 활동한 것은 1919부터 1921년까지의 2년에 불과하다.

1919년 초에 일단의 한국인들이 파리에 왔다. 이들은 그해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제1차대전 종전 평화회의에 파견된 해외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이었다. 한국이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그 당시, 해외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은, 그해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 자결주의에도 고무되어, 이 평화회의에 지대한 희망을 걸고 대표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미국에 있던 대한국민회는 1919년 10월1일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강화회의에 보낼 대표단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있던 미국 당국이 비자를 발급하여 주지 않아 파리에 올 수 없었다.

   
 
  ▲ 김규식 선생   
 
상해의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은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 이름에 중국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의 파리행 배편은 남방호법(南方護法) 정부 대표 진경민이 마련해 주었다. 그의 프랑스 파견 소식을 전해 들은 파리 주재 일본 대사관은 프랑스 정부에 좌초된 선박의 선원 이외의 한국인으로서 일본 여권 혹은 비자를 소지하지 않은 자의 프랑스 입국을 거절하도록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무사히 파리에 도착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이를 위한 운동을 하는 프랑스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의 방해와 압력 때문에 프랑스의 집권층과는 관계를 가지기 어려워, 압박을 받고 있던 민족에 동정적인 이들과 교분을 맺고 이들의 협조를 얻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역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김규식은, 역시 중국 이름에 중국 여권을 소지한 김탕, 조소앙, 여운홍을 대동하고 파리에 도착하여, 3월 20일 파리 교외의 고급 주택가 뇌이이(Neuilly)에 살고 있던 중국인 사회 운동가 리유잉의 집에 세를 들었다. 이들은 여기서 외교, 홍보 활동의 준비 작업을 했다.

한편 시베리아 대한국민회에서는 한인신문 발행자 윤해와 고창일을 1919년 2월 파리로 보냈다. 이들은 혁명으로 소란한 러시아를 북쪽으로 돌아, 놀웨이, 영국을 거쳐 평화회의가 이미 끝난 9월 26일 파리에 도착했다.

이때 한국 국내에서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고, 4월 11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임시정부 의정원은 4월 13일 파리에 있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 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임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로 당당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파리 대표부에 신임장을 보내야 한다는 촉박한 사정이 임시 정부의 성립을 촉진했다고도 할 수 있다.

4월 하순경 위원부는 파리 제9구 샤또당 가(街)(rue de Châteaudun) 38번지에 사무실을 연 다음, 사서함, 전화, 텔렉스를 갖추고 본격적인 외교, 홍보 활동을 벌렸다.

위원부는 당시 한국의 입장, 한국 독립의 필요성, 임시정부 등에 관한 많은 문서를 작성하여 관계요로에 보내는 등, 평화회의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렸으나, 자기의 이해관계에만 급급했던 열강의 냉대와 일본의 방해로 계획했던 목적은 이룰 수 없었고, 평화회의는 6월 28일 대독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끝났다.

평화회의가 끝난 후, 누차 이승만 대통령의 소환 명령을 받아오던 김규식은 김탕, 여운홍을 데리고 1919년 8월 8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후 이관용이 위원장 대리를 맡고, 황기환이 서기장으로 집무했다. 그해 9월 26일에는 시베리아에서 윤해, 고창일이 파리에 도착, 위원부에 합류하여 힘을 합했다. 10월 10일 이관용이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돌아가자, 황기환이 위원장 대리가 되어, 런던 주재위원을 겸하여 파리와 런던을 오가면서 활동했다.

그해 말 네델란드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대회에 참석한 조소앙은, 대회가 끝난 후 영국, 덴마크, 단치히 자유시, 발틱 3국을 거쳐 소련을 다니면서 외교활동을 전개한 후 1921년 12월 상해로 돌아갔다.

1920년 1월 4일 국제평화촉진회가 주최한 재불 중국사회단체연합회 대회에서는 윤해와 고창일 환영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 취소 및 한국독립 결의안 ’을 통과시켰다. 며칠 후인 1월 8일에는 파리의 쌩-제르맹 가(街)에 있는 프랑스 지리학회 강당에서 파리대학교 올라르 교수의 주재로, 인권연맹 및 한국위원부가 공동으로 한국 및 중국 문제 여성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각계 인사 500여명이 참석했는데, 파리대학교의 펠리씨앙 샬래 교수와 중국인 사회운동가 사동발, 무떼 하원의원이 한국 실정을 소개하고 일본에 의한 대한국인 인권유린을 규탄했다.

1월 15일에는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이 대한적십자사 유럽지부장 자격으로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적십자사 총회에 참석하여, 대한적십자사를 일본 적십자사로부터 분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또 일본의 폭정과 간도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이탈리아 미라노에서 국제연맹 사회단체 연합회 제4차 대회가 열렸다. 위원부는 국제연맹 한국위원회 이름으로 윤해와 이관용을 파견했으나 역시 일본의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윤해, 이관용의 대회 참가는 헛되지 않아 이듬해 6월 10일 제네바에서 열린 동대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어 각국의 동정을 얻었다.

위원부 사무실은 1920년 5월에 파리 9구 샤또당 가 38번지에서 8구의 비엔느街 13번지로 이전했다.

파리 주재 위원부는 1919년 11월 19일 프랑스 쉬이프(Suippes)에 한인국민회를 결성하는 한편, 1920년 10월 3일 위원부 대표 황기환이 런던 주재 외교위원으로 임명된 뒤부터는 영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맥켄지의 협력으로 그해 10월 26일 대영제국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1921년 2월부터 파리대학교의 펠리씨앙 샬래 교수와 중국인 사회운동가 사동발이 중심이 되어 일을 추진한 결과, 4월 25일 친우회 내의 행동위원회 조직을 위한 회합을 가진 후, 6월에 한국 친우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내무성 안전국이 조사하여 외무성에 통보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친우회는 6월 23일 파리의 라스-까즈 가 5번지 사회박물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정관 채택, 임원 선출, 회장 및 대표들의 연설이 있었고, 또 런던, 브랏셀의 한국 연락원들이 보내온 전보, 그리고 프랑스 랭스, 플래르, 보배에 거주하는 한국 학생들이 보내온 격려의 편지도 대독되었다. 이 단체는 7월 10일 비영리 사회단체로 내무성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친우회 사무국 주소는 사동발의 아파트인 오쓰만 가 93번지였다.

6월 23일 창립총회 참가자 총 수는 23명으로, 그중에는 중국인과 한국인 9명, 여자 6명이 들어 있었다. 한국친우회의 회원은 사동발과 중국 부영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스인들이었는데, 하원의원, 교수, 문인, 언론인이었다.

   
 
  ▲ <자유대한> 제2호 표지   
 
위원부는 외교활동 외에도 선전 활동에 주력하여 <회람> (Circulaire)과 <자유대한>(La Corée libre) 이란 정기간행물과 여러 책자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발간하여 프랑스 정부 기관, 언론 기관, 저명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회람은 1919년 4월 26일 제1호가 나온 후, 그해 11월 29일자인 22호를 내고 정지되었는데, 4-5면의 서간 형식이었고, 김탕이 주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대한>(La Corée libre)은 1920년 5월에 시작하여 1921년 5월까지 전부 13호가 나왔는데, 4,5호 및 11-13호는 합판이므로 총 10책, 총 350쪽에 달한다. 여기에는 한일합방 이후부터 1921년까지의 한국 사정, 임시정부의 활동, 외교사, 일본 및 한반도 주변 정세 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불어 서적목록, 한국의 문화, 언어 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다.

1921년 7월, 위원부의 마지막 임원으로 유럽에서 활약해 오던 황기환이 태평양회의 관계로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 그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23년 4월 18일 그가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대유럽 외교는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한국 친우회의 활동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후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외무행서규정을 결의하고, 이에 따라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이승만을, 주불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서영해를 임명하였다. 서영해는 파리에 있는 동안 역사소설 한 권과 한국 민담집 한 권을 저술했다. 그는 해방후 귀국하였으나 한국 동란 때 북한에 갔기 때문에 그후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1948년 7월 12일 채택된 초대 대한민국 헌법과 1987년 10월 국민투표로 채택되어 1988년 2월 25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시행 중인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정부이다. 따라서 주파리위원부는 임시정부가 성립되기도 전에 파견되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 받은 최초의 대한민국 해외 대표부였으므로, 주파리위원부의 활동이 단기간이었고, 그후 단절되었다고는 해도, 현 주불 한국대사관은 위원부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위원부 시절, 무르만스크에서 철수하던 영국군의 보호 아래 있던 한국인 근로자 500여 명 중 겨우 200명이 출발하여 1919년 10월 16일 영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고, 주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이 런던을 거쳐 에딘버러에 가서 200여 동포를 방문했다. 그리고 황기환은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이들을 프랑스로 데려갈 수 있도록 협의하였다. 한인 노동자 500여 명을 받아 주기로 언약한 프랑스 법무성은 프랑스의 동양인 노동자 배척 분위기 때문에 한인 노동자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이진명 프랑스 리옹3대학 교수   
 
그래도 그중 35명이 르 아브르 항을 통해 프랑스에 입국하여, 한인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재법한인국민회가 샬롱-쉬르-마른느(Châlons- sur-Marne) 도의 스위프(Suippes)에 살고 있던 이들 한인 근로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1919년 11월부터 스위프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국민회가 조직될 당시 위원부 대표 김규식은 미국에 가고 없었으므로, 황기황 등이 한인국민회 결성을 도왔다. 위원부는 또, 프랑스로 유학온 한국 학생들이 보배(Beauvais)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도와 주었다.

반면에 재불한인국민회 회원들과 학생들은 파리에 한국친우회가 결성될 때 참가도 하고, 격려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금을 모아 위원부 활동을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공관과 교민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교민들, 프랑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과 공관이 모두 주 파리 임시정부 위원부의 활동을 되새겨 보고, 기리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진명 교수는 1946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국비 장학생에 선발돼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1977년 파리4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1년부터 리옹3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정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국내에서는 ‘재불 독도연구가’로 유명합니다. 현재 동해학회 해외 이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프랑스한국연구회 회원입니다.

이 칼럼은 프랑스 파리에서 운영되는 ‘주간 유로꼬레(http://www.euro-coree.net)’에도 게재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진명 교수

제목
외세의 침략과 개항2 2008.03.19
외세의 침략과 개항 2008.03.19
3.1운동과 주 파리위원부와 공관과 한국 교민 2008.03.13
러일전쟁의 발발과 을사조약의 체결 2008.03.06
을미의병의 분개 2008.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