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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극우 위협에도 군국주의 비판한 평화운동가재일 한인 권익 옹호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5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토요일이지만 많은 차량이 정문을 오가면서 활기가 감돌았다. 불교 철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수여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1928년생인 이케다 회장은 ‘생명 존엄’과 ‘한 사람의 내면 변화’라는 ‘인간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해왔다. 1968년 소카중·고등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교(일본·미국 소카대)까지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동양철학연구소, 민주음악협회, 도쿄후지미술관,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 등을 창립했다. 작가이자 시인이면서, 사진전도 개최한 바 있는 등 문화·예술에 정통하기도 하다. 여러 방면에서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이날 수여식에는 박정운 한국외대 총장과 노택선 한국외대 대학원장, 95세의 이케다 회장을 대신한 하라다 미노루 창가학회 회장, 김인수 한국SGI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1999년부터 이케다 회장과 교유(交遊)해 온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축사를 했다.


마침 수여식이 열린 장소의 명칭은 오바마홀이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곳이다. 박 총장은 수여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핵무기 확산 억제에 대한 비전과 핵무기 없는 세상을 통한 세계 평화의 길에 대해 강연했다”면서 “특별 강연을 기념해 오바마홀로 명명한 바로 이곳에서, 평생을 평화운동 그리고 반핵운동에 투신한 이케다 선생님께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게 된 것도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혜와 자비, 용기


또한 이케다 회장은 2009년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비롯해 24개국에서 국가훈장을 수훈했다. 한국외대 명예철학박사 학위로 국내 20번째, 세계 403번째 명예학술 칭호를 받았다. 지난해 한국의 충북대에서 받은 명예교육학박사 학위가 400번째 명예학술 칭호다. 이를 포함해 그간 국내에서는 경희대, 제주대, 동아대, 창원대, 홍익대, 북한대학원대, 부경대 등에서 그에게 명예학술 칭호를 수여했다.


해외에서는 러시아 모스크바대, 중국 베이징대와 푸단대, 대만 중국문화대, 베트남 하노이국립대, 영국 글래스고대, 인도 델리대, 호주 시드니대, 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캠퍼스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중국·러시아와 미국·호주 등 이른바 진영을 달리하는 국가를 아우르는 점이 특징이다. 그가 펴온 활동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케다 회장의 활동을 이해하려면 SGI의 역사부터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SGI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 니치렌(日蓮)이 주창한 불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단체다. 니치렌은 법화경이 불법의 궁극적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명시하는 개념이 만인 평등 사상이다. 법화경의 관점에서 보면, 불계는 마지막에 성취하게 되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불계는 모든 사람의 현실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지혜와 자비, 용기를 말한다. 불법의 목적은 생명 속에 내재된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데 있다. 이것이 SGI 사상의 지류에 흐르는 사고다.


법화경의 제목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다. 일본어로는 ‘묘호렌게쿄’가 된다. 여기에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나마스(namas), 또는 ‘나모(namo)’를 음역한 ‘나무(南無=남)’가 붙었다. SGI에 따르면 ‘나의 몸과 마음을 법화경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이 ‘남묘호렌게쿄’이고 이것이 부처가 깨달은 법의 이름이다. SGI 회원들이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는 배경이다. 즉 SGI에서는 일종의 고유명사다.


니치렌의 불법을 근본 삼아 창가교육학회가 결성된 시기가 1930년이다. ‘창가(創價)’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초대 회장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2대 회장은 도다 조세이다. 이후 1960년 도다의 제자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창가학회 3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케다 회장의 나이 32세 때다. 한국에 창가학회가 전파된 시기도 이케다 회장이 취임할 무렵인 1960년대 초다. 특별한 성직자 없이 회원 사이에서 고민을 주고받는 형식의 좌담회를 통해 규모가 차츰 확장돼 왔다.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케다 회장은 1975년 창가학회 세계화를 기치로 국제창가학회(SGI)를 설립하고, 이후 세계적 규모의 종교단체로 발전시켰다. 오늘날 세계 192개 지역·국가에 약 1200만 명의 SGI 회원이 있다. 국내에는 약 150만 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역사나 규모에 비하면 외려 국내에서 대중적 지명도가 낮다고 보일 정도다.



“고통과 슬픔 불행의 소용돌이”

이케다 회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군국주의 일본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저서 등을 통해 “공습과 소이탄으로 인해 이웃들이 죽어가는 모습, 입대한 형에게 전해 들은 중국인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 형의 죽음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깊은 슬픔,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야기한 냉정하고 거만한 정치지도자들에게는 강한 분노” 등 당시의 경험을 상세하게 묘사해 왔다. 그가 과거를 회고하며 남긴 말이다.


“나와 같은 세대의 많은 젊은이가 군국주의 정부의 선전선동에 의해 자랑스럽게 최전선으로 향해 목숨을 바쳤다. 희생하며 남겨진 가족들은 당시 높은 존경을 받던 ‘군인의 어머니’로 불리며 칭찬을 받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통과 슬픔, 불행의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 위대한 어머니의 지혜는 ‘국가를 위해’라는 공허한 문구에 속지 않는다.”


창가학회 초대 및 2대 회장이 ‘반(反)군국주의’ 가치를 강조한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군국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종교관에 반대한 초대 회장 마키구치는 1943년 사상범으로 수감됐다가 이듬해 옥사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모든 사람은 천황의 황민’이라고 선포했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교육 지침을 만들었다. 일본 군부가 종교 단체에서도 군국주의의 상징을 모시라고 강요했을 때다. 2대 회장 도다 역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년간 투옥됐다. 스승과 제자가 공히 서슬 퍼런 시절임에도 군국주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셈이다. 평화, 만인 존엄 등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이케다 회장이 군국주의 반대 신념을 유지한 건 창가학회의 초기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1998년 SGI는 ‘핵 폐기 2000’이라는 세계적 서명운동을 이끌어 1300만 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유엔에 제출했다. 또 반핵과 관련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SGI의 활동이 인권, 핵 폐기, 무장해제, 지속적 발전과 문화 교류 등으로 뻗어나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담집 70여 권

‘이케다 평화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대화에 대한 신념이다. 그가 세계 각국의 지성과 만나 대화한 횟수만 해도 7000회에 이른다. 비교적 최근인 2000년 이후에는 평화학자 앨리스 볼딩, 미래학자 헤이즐 핸더슨, 하버드대에서 강의하는 세계적 신학자 하비 콕스, 노벨평화상 수상자 조지프 로트블랫,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재즈의 전설로 꼽히는 허비 행콕과 웨인 쇼터 등과 대담한 내용이 책으로 엮였다. 이렇게 출간된 대담집이 70여 권에 이른다. 이와 관련해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류사가 멈추지 않는 한 ‘대화야말로 평화의 왕도’라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짊어져야만 하는 숙제다. 이는 대화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끝없는 도전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반론이나 냉소를 당하더라도 이 신념을 최후까지 부르짖는 기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일으킨 문제인 이상, 인간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고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한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한, 타개할 길은 반드시 보인다. 그 최대의 열쇠는 바로 대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얼마만큼 끌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대화 없이 인간은 자기 독단주의에 빠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대화는 그 어둠을 밝혀줄 등불이 되어 서로의 길을 밝혀줄 것이다.”




그의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영향이 있었다.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와 독자적 문명 사관을 담은 역작 ‘역사의 연구’를 쓴 바로 그 토인비다. 이케다 회장과 토인비 박사는 1972년과 1973년 영국 런던에서 만났다. 토인비 박사는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또 불교가 현대문명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철학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이케다 회장을 런던 자택으로 초대했고, 10일간의 대화와 이후 이어진 서신 왕래에서 오간 이야기를 엮어 1976년 ‘21세기를 여는 대화’가 출간됐다. 현재까지 세계 31개 언어로 번역됐다.


이케다 회장이 종교와 지식사회를 넘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대다. 그는 이때부터 각국의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이 시기 소련, 중국, 미국을 방문해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등과 만나 세계평화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핵무기 위협으로 초강대국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을 때다.


1970년대의 기억

가장 좋은 예가 중국이다. 1970년대가 오기 직전, 그러니까 1968년의 일이다. 이케다 회장은 일본 대학생 2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중·일관계 정상화를 주창했다. 두 나라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전쟁 상태였다. 지금도 중·일 사이에 일정한 긴장감이 남아 있지만, 당시 일본에는 반중(反中) 및 반(反)공산주의 정서가 팽배한 때였다. 그해 9월 8일 ‘중·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제언’에서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일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23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오늘 모인 여러분 대부분은 그 분쟁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세대다. 중국의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살아갈 양국의 청년에게 과거의 전쟁으로 발생한 상처를 무거운 짐으로 남겨서는 결코 안 된다.”


실제로 이케다 회장은 연설 이후 일본 우익들로부터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다 보니 중국 정치권에서도 이케다 회장과 창가학회를 주목하는 시선이 늘었다. 실제로 이로부터 4년 후 중·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그리하여 1974년 12월, 이케다 회장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1976년 1월 사망 때까지 총리를 지낸 중국공산당의 핵심 중 핵심이다. 즉 저우언라이 총리가 이케다 회장을 만난 시기는 그가 사망하기 불과 1년 1개월 전이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말기암으로 입원 중일 때다. 이케다 회장의 전집 123권에는 당시 만남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총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엇을 논하더라고 가장 힘주어 강조한 부분은 바로 미래 즉 다가올 세기에 관한 일이었다. 자신의 죽음 뒤에 펼쳐질 상황을 깊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25년간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시기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처지에서 도우며 노력해야 한다.’ 그 25년 동안 아시아와 세계를 위해 보다 견고한 평화의 길을 닦겠다는 총리의 결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가올 세기에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기를 갈망했다. 나는 유언을 듣는 심정으로 총리의 말을 경청했다.”


1975년 1월에 미국으로 간 이케다 회장은 수도 워싱턴에서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케다 회장이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바라고 있다”고 전하자 키신저 장관이 찬성 의사를 밝혔고, 실제로 그로부터 3년 후인 1978년 8월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됐다.


즉 1974~75년은 이케다 회장 개인에게나, 국제사회에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이에 대해 이케다 회장이 남긴 말은 이렇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는 중국, 소련, 미국을 연이어 방문해 각국 정상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민간인 처지에서 긴장 완화를 향한 길을 모색했다. 미소 대립에 더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소가 대립하는, 이른바 세계를 3분할 수밖에 없는 위기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냉전이 종결된 지금 와서 돌아보면 당시 이케다 회장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적잖은 의미가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 이케다 회장에 대한 평가가 높은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은 스승의 나라”

그는 대표적인 지한파로도 꼽힌다. 5월 20일 한국외대 명예철학박사 수여식에서 발표된 이케다 회장의 답사에는 “제 아버님은 젊은 시절에 징병으로 서울에 체재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목격한 일본인들의 횡포나 거만한 태도에 분노하며 어린 소년이던 저에게 해주신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는 평소 일본 학생들에게 세종대왕, 이순신, 유관순, 안창호 등 한국 위인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예컨대 유관순을 두고는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린다”고 소개하고, 안창호에 대해서는 “한민족 독립운동의 아버지로서 일본의 비열한 침략과 끝까지 싸운 위대한 투사로서 몇 번이나 감옥에 투옥됐다”고 설명한 것이다.


창가학회가 발행하는 일본 종합일간지 세이쿄신문 ‘역사의 거인’ 코너를 통해 유관순을 소개하기도 했다. 극우 세력의 힘이 존재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선뜻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수성 전 총리는 이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면서 “이케다 회장과 같은 인물이 삐뚤어진 일본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케다 회장은 실제로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학술에 정통하다. 한국을 ‘문화대은(文化大恩)의 나라’이자 ‘형님의 나라’ ‘스승의 나라’라고 여러 번 말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편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에 가한 침략에 대해 지금도 사죄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의 회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2000년 4월, 소카대 졸업식에 초대받아 처음으로 이케다 선생을 뵙게 됐는데, 그때 나는 성급하게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일본이 진솔하게 반성하지 않아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케다 선생은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운 나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며 일본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1000명이 넘는 일본 청년들이 모인 소카대 강당에서, 내가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강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때 받은 이케다 선생의 배려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수성 前 총리의 기억

이케다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소련을 방문해 올림픽 참가 약속을 직접 받아내기도 했다. 또 일본 극우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주창했다. 그를 두고 재일 한국인 권익의 대변자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외대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에 축사자로 나선 이수성 전 총리 역시 “1999년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주창한 이케다 선생을 장시간 만나면서 내 마음에 남은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케다 회장은 SGI 결성일을 기념해 1983년부터 매년 1월 26일에 평화 제언을 발표한다. 개중에는 한반도 문제를 다룬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 가령 남북 정상회담 개최(1985),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1986), 이산가족을 위한 재회교류센터 개설(1994), 한·중·일 우호 청년 교육교류 추진(2005), 한·중·일 환경 협약 제도 마련(2016) 등이다. 일본인으로서 그가 한국에 가진 부채감과 애정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그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다. 신동아 2023년 7월호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기사출처 :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3/02/13/4248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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