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07년(광무 11)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 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을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기독교 정신으로 바꾸어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거주의 제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大邱)와 경성형무소에서 4년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이 중앙학교 안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 모여, 한말(韓末)의 요직자와 기독교측의 동지를 포섭키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손병희(孫秉熙)를 민족대표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와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키로 하고, 이를 최남선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동지를 구하는 일을 맡았는데, 우선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그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은 2월 11일 사람을 중계하여 이승훈을 오산학교 경영의 구실로 하여 상경케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일본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송진우로 하여금 김성수(金性洙)의 집에서 그를 만나게 하여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규합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즉각 찬성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당일로 서울을 떠나 선천(宣川)으로 가서, 이튿날인 12일 장로교 목사인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유여대와 김병조의 인장을 위탁받고, 양전백과 이명룡에게는 상경하도록 하였다.
14일에는 평양의 기홀(紀笏) 병원에서 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에게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설명하여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20일 밤에는 박희도(朴熙道)의 집에서 남감리파의 목사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신홍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계획에 대한 협의 끝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고, 정춘수로 하여금 원산(元山) 방면을 담당케 하였다.
이튿날인 21일 그는 최 린의 집에서, 최남선·최 린과 만나 전날 밤 박희도의 집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들이 모여, 기독교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동지들과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다시 세브란스 병원내의 이갑성(李甲成) 처소에서, 박희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咸台永)·김세환(金世煥)·안세환(安世桓)·현 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결국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 결정키로 하고 이 문제를 함태영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22일에는 최 린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으로 5천원을 원조받고, 함태영과 함께 천도교측의 독립운동계획을 물어보자, 최린은 기독교측의 계획대로 독립선언을 하지않고 독립청원서만을 제출하려면 연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기독교측의 대표들과 모여 독립운동 계획의 방법을 숙의한 끝에, 천도교측의 주장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 린을 찾아가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의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국장(國葬) 직전인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고, 스스로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박희도·이갑성·오화영·이필주·함태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이에 찬성하여 함태영을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天道敎)·기독교·불교(佛敎)측의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33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가 1년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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