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선천(宣川) 사람이다.
1904년 숭실(崇實)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성(大成)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소위 사내 총독(寺內總督)암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동년 8월 독립신문의 기자로서 조동호(趙東祜)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6월경 김승학(金承學)이 동사 사장이 되어 신문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편집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교포들에게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李東寧)이 피선되고 그는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김붕준(金朋濬)·김홍서(金弘 )와 함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의정활동에 참여하는 등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1922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하여 뜻을 같이 하였으며,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간의 이견 조정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를 조직하고 안창호·손정도(孫貞道)·주요한(朱耀翰)·이규서(李圭瑞) 등과 함께 그 중심인사로 활동하였는데, 1931년 3월까지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여 민족계몽운동을 펴는 등 노력하다가 이사(理事)직을 물러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28일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 그는 김 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1928년에는 이동녕·이시영·조소앙·김 구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한보(韓報)", "한성(韓聲)"을 발행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정신 선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는데, 1943년 5월 8일 중경(重慶)에서 개최된 제3기 전당대회에서는 그가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5년 임시정부가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분당 싸움이 거듭되고 국무위원들도 사퇴를 하였으나 그는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키며 정부의 재건에 부심하여 광동(廣東)에 있는 김붕준(金朋濬)·양명진(楊明鎭)과 연락을 취하고, 항주(杭州)에 있는 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 등의 협력을 부탁하여 그 승낙을 받고, 다시 가흥(嘉興)에 있는 이동녕(李東寧)에게 협의를 거듭하는 등,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키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35년 11월 13일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주석에는 이동녕(李東寧)·내무장 조완구(趙琬九)·외무장 김 구(金九)·재무장 송병조(宋秉祚)·군무장 조성환(曺成煥)·법무장 이시영(李始榮), 그리고 그는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또한 신당 운동에 참가했던 한국독립당이 민족혁명당의 창립과 함께 해체되어 임시정부의 여당이 없어졌으므로 새로운 여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11월에 창립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광복에 헌신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임시정부의 환국준비에 분주하던 중 동년 9월 9일 이국 땅 중경(重慶)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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