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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반봉건 항거 3·1혁명이라고 부르자”


제93돌 3·1절인 2012년 3월1일 오전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3·1 독립만세운동 재현 체험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이 독립문 앞까지 행진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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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70여명 오늘 추진위 결성식 “독립운동이자 군주제 반대운동”

1938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절 기념식에서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민족운동”이라며 3·1운동의 ‘혁명성’을 강조했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한 독립운동이자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국’ 이념의 씨앗이 된 반봉건 혁명이라는 규정이었다. 이후 3·1운동은 해방 뒤까지 ‘3·1혁명’으로 불렸다. 제헌헌법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하지만 제헌헌법에는 결국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봉건 투쟁의 의미가 축소된 것이다. ‘3·1혁명’이란 이름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사회·종교단체 회원들이 나섰다. 강만길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우전 전 광복회장 등 70여명은 26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3·1혁명추진위) 결성식을 연다고 25일 밝혔다.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재정립하고 이름을 ‘3·1혁명’으로 바꾸려는 모임이다. 학계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논한 적은 있지만 3·1운동을 혁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본격적인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3·1운동은 2019년 100주년을 맞는다. 3·1혁명추진위는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이라는 명칭이 확정되며 ‘군주제와의 혁명적 단절과 민주공화국 지향’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빠진 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독립운동’으로 한정됐다고 지적했다. 이준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1혁명 당시 각계각층은 독립과 함께 군주제가 아닌 근대국가를 만드는 미래를 꿈꿨고, 이 정신을 임시정부가 이어받으면서 민주공화국 정치체제를 만들게 됐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3·1혁명을 민주와 평등이라는 근대국가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혁명으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제정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제’ 정체를 확실히 했다. 이후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헌법, 1927년 대한민국임시약헌, 1944년 대한민국임시헌장 등에서도 민주공화국 이념은 유지됐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는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야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들어간 유럽보다도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결국 ‘운동’으로 규정된 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제헌헌법 초안과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등에선 ‘3·1혁명’으로 표현됐지만, 1948년 7월 속기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혁명은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일제)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 아닌 항쟁”이라며 ‘혁명’ 규정을 반대했다. 여기에 일부 의원들도 힘을 보태면서 ‘운동’으로 정리됐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기미년 사건을 3·1혁명으로 파악했고, 해방 뒤에도 3·1혁명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사용됐다”고 말했다. 박승헌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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